명준스님의 금요법문 공지사항

12월 09일 금요법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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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작부 작성일17-01-04 00:00 조회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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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철선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돈오돈수(頓悟頓修) -

성철선사께서는 보조지눌선사는 경절문의 활구를 알기는 했지만 지혜의 해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마도 간화결의론의 논점을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보조지눌선사의 『간화결의론』에 따르면, 화두(話頭)를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데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참의문(參意門)이고, 둘째는 참구문(參究門)입니다.

참의문(參意門)은 처음 돈오(頓悟)하고 점차(漸次)로 닦아나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돈오(해오)점수(漸修)를 의미하는 원돈문(圓頓門)의 수행방법입니다.
성철선사는 여기 돈오를 지해종도의 해오라고 합니다.

둘째의 참구문(參究門)은 자기의 진정한 면목인 일심(一心)을 직접 깨닫는 방법입니다.
요즘에는 참의문(參意門)으로 화두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의문으로 화두를 들면 참구문(參究門)보다는
그 수준이 낮게 됩니다.

그러나 참의문(參意門)이라 하더라도 교(敎)에 의지해서 관행(觀行)을 닦지만,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한 사람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습니다.
따라서 참의문(參意門)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보조지눌(普照知訥)선사와 성철(性徹)선사는 구분됩니다.
보조지눌(普照知訥)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의 수행에 비중을 두면서도 돈오(해오)점수의 수행론을
포용(包容)하고 있는 데 비해서, 성철(性徹)선사는 간화선의 수행에서 돈오(해오)점수의 수행을
배척(排斥)합니다.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화두에 참의(參意)와 참구(參究)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요즘 의심을 깨뜨리는 사람은 대개
참의(參意)의 의미이지, 참구의 의미로 의심을 깨뜨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돈문에서 바른 해오(解悟)를 일으키는 경우와 일치한다.

이와 같은 사람이 관행을 하는 마음 씀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보고․듣고․이해하고․실천하는
공(功)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요즘의 문자만 공부한 법사가 관행(觀行)을 하는 것보다
수준이 높을 따름이다.

곧, 문자만 공부한 법사는 관행을 닦는다 해도 안으로는 마음이 있다고 분별하고, 바깥으로는
모든 이치를 구하여, 이치를 구할수록 그 이치는 더욱 미세해지고, 결국에는 바깥 모습만을 취하는
병이 있게 된다.

그러하니 어찌 참구문(參究門)에서 의심을 깨뜨려서 일심을 친히 증득하고, 반야의 지혜를 발휘하여
 [그 반야를] 널리 베푸는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증득한 지혜는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보고 듣기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화두의 참의문에 의지해서 바른 지견(知見)을 일으키는 것을 귀하게 여길 따름이다.
왜냐하면 [참구문보다 못하지만 참의문 경지의] 사람의 깨달은 수준을, 교(敎)에 의지해서
관행을 닦았지만 아직 정식(情識:번뇌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과 비교하면,
그래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의문 공부도 의미가 있다].

보조지눌과 성철선사의 차이점은 방편적(해오점수) 수행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해오(解悟)점수(漸修)의 수행을 인정한다고 해서 보조지눌의 수행경지가 낮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돈오(해오)점수를 내용으로 하는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의 내용을 지눌스님께서도
선가(禪家)의 사구(死句: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인도하지 못하는 화두 이해방식)에 속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또한 초심자(初心者)를 위해서는 돈오(해오)점수를 내용으로 하는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의 수행도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눌스님은 근기가 뛰어난 사람에게는 경절문(徑截門)수행을 권하고,
초심자에게는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의 수행을 권하고 있습니다.

성철선사는 『한국불교의 법맥(증보판)』에서 보조지눌이 삼현(三玄)을 수용하고 있는데
이는 보조지눌의 안목에 문제 있음을 보여주는 예(例)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철선사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간화결의론』에서 보조지눌스님은 삼현(三玄)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삼현(三玄)을 수용하는 사람은 사구(死句)를 인정하는 부류라고 보조지눌(普照知訥)은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조지눌스님이 본 삼현(三玄)의 내용은
곧 체중현(體中玄: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이치를 깨닫는 것),
구중현(句中玄: 경절문의 화두에 의지해서 體中玄의 경지를 넘어섬),
현중현(玄中玄: 침묵, 봉, 할 등을 통해서 句中玄의 경지를 넘어섬)을 소개하고 나서,
조사의 가르침(선종)과 비교해 보면 삼현(三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간화결의론』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 성철선사는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안목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철선사가 보조지눌의 사상을 평가할 때 놓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화결의론』에서 참구문(參究門)의 수행법으로‘무자’화두10종병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간화선(看話禪)을 처음 주장한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도 명확히 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의지처로 삼는 대혜스님은 조계의 6조스님의 바른 맥을 이어온 제17대 본분종사(本分宗師)입니다.

대혜스님이 주장한 경절문(徑截門)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닫는 것은, 이것(단계적으로 깨달아 올라가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무슨 이유인가? 종사(宗師)가 가르치신 ‘뜰 앞에 잣나무’, ‘마삼근’,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등의 화두는 모두 명백히 가르칠 수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재미없고 따질 수 없는 화두를 [수행자에게] 준 다음에 가르치기를 “정식(情識)이
아직 깨뜨려지지 않았으면, 마음의 번뇌 불이 활활 타오를 것이니, 바로 이러할 때 의심의 대상인
화두를 [마음속으로] 든다.

예컨대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으니, 다만 [이 화두를] 의심해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곧 왼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고, 오른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 곧,
① 있다․없다 라고 이해하지 말고,
② 진정한 없음의 없음이라고 이해하지 말며,
③ 이치가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지 말고,
④ 의근(意根)이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말며,
⑤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자기 진면목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⑥ 말 속에서 깨달음을 구할 생각을 하지 말며,
⑦ 모두 날려버리고 일 없는 곳에서 한가롭게 빈둥거리지 말고,
⑧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자기의 진면목이라고 이해하지 말며,
⑨ 경전을 인용해서 이해하지 말고,
⑩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지어다.

곧장 마음에 분별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마음에 분별이 없을 때 허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
이러한 경지가 깨닫기 좋은 경지이다. 비유하면, 늙어서 약아빠진 쥐가 소뿔로 된 덫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문득 견해의 뒤바뀜이 끊어질 것이다.

성철선사의 잘못 읽은 점.
끝으로 덧붙여 말하거니와 보조의 상수제자인 진각혜심(眞覺慧諶)은 말하기를
“간화선의 문은 으뜸이 되는 지름길이니, 지관 및 정혜가 그 가운데 저절로 들어있다.”고 하여
항상 간화(看話)를 주장하고 정혜쌍수를 권장하지 않았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조와 서로 다른 점이다.
(『한국불교의 법맥(증보판)』, p.206)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진각국사 혜심에게서의 수행의 요점은 지관(止觀)과 정혜(定慧)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고,
그 이외에 간화선 수행이 있는데 지관과 정혜가 간화선 수행 속에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각국사 혜심이 간화선을 주장하고 정혜쌍수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성철선사의 주장은
진각국사 혜심선사의 어록(語錄)의 내용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수행의 요점은 지관과 정혜를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공(空)함을 비추어 보는 것이 관(觀)이고, 모든 분별을 그치는 것이 지(止)이다.
지(止)는 허망함을 깨달아서 그치는 것이지, 마음 씀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관(觀)은 허망함을 보아서 깨닫는 것이지, 마음을 써서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경계를 마주 대하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정(定)이지, [이것은] 힘써 [분별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품을 보아서 미혹되지 않는 것이 혜(慧)이지,
[이것은] 힘써 구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렇지만, 공부해서 힘을 얻었는지, 힘을 얻지 않았는지 점검해서 알 때야,
[지관과 정혜의 수행이]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이외에 간화문 수행이 있으니 가장 빠른 길이다. 그리고 지관과 정혜도 자연히
간화문 수행 안에 들어있다. 그 가르침의 자세한 내용은 대혜스님의 『서장』에 실려 있으니
살펴보도록 하라.

『조계진각국사어록』, 「손시랑求語」( 『한국불교전서』 6권, 40a),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철선사의 보조지눌 사상 비판의 제한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성철선사의 보조지눌 사상의 비판에 문제점이 더 많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성철선사의 비판에도
경청할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돈오(해오)점수를 읽는 데는 두 가지 읽을 방법이 있습니다.
이미 돈오하였고, 이제 번뇌만 점차로 제거하면 된다는 관점이 있고,
돈오는 하였지만 아직 번뇌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수행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성철선사의 돈오돈수(頓悟頓修) 주장을 접하기 이전에는 성철선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전자의 관점(돈오를 강조하는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철선사의 돈오돈수 주장을 알고 나면서 부터는 후자의 관점(점수를 강조하는 관점)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철선사의 돈오돈수 주장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보조지눌의 사상을 보는 관점과도 연결됩니다. 전자의 관점(돈오를 강조하는 관점)은
보조지눌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본 것에 기인합니다.
성철선사의 보조지눌의 비판은 보조지눌 작품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나아가 목정배 교수는 성철선사의 주장에 제한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전통에서 보자면 통불교의 요소가 없을 수 없지만, 선수행의 측면에서 보자면
돈오(해오)점수의 수행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문정로』의 돈오돈수에서는 보살행을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치로는 돈오이지만 사(事)는 점수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2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해오점수’로 해석해서 ‘해오’한 뒤에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한다고 풀이할 수도 있고,
둘째, ‘증오점수’로 해석해서 ‘증오’한 뒤에 번뇌는 남아있지 않지만 모든 선행을 닦아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종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철스님은 증오(證悟)한 뒤에 번뇌의 습기가 남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라는 부분을
이는 󰡔박산법어󰡕에서 불오염(不汚染)의 수(修)를 말한 것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성철스님은 번뇌의 습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대지도론󰡕에 의거해서 풀이합니다.
(이 또한 성철선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문제입니다. 선의 이치를 교의 이론에 따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교(敎)의 해오(解悟), 분증(分證)으로는 선(禪)의 증오(證俉)를 알 수 없고,
따라서 교(敎)의 언어로 선(禪)의 최고경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오돈수가 되었던 돈오점수가 되었던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교학을 통해 충분히 자신의 의심처를 발견하고 1700 공안의 가르침들 속에서 자신의 의심과 맞아 떨어지는 화두를 채택하여, 의심이 뭉쳐지게 되면 쇠뿔 속으로 들어간 벌레처럼 자신을 그 의심 속으로 몰아넣어 열심히 참구해가는 간화선 수행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문제는 자신 속의 간절한 의심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니 말입니다.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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